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 항명 파동 (문단 편집) == 결과 == 10.2 항명 이후, 공화당 내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따라서 10.2 항명 파동은 1972년의 [[10월 유신]]을 추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1969년의 [[3선 개헌]] 때도 개헌에 반대하는 항명세력을 찍어누른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비슷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입장에서도 [[제7대 대통령 선거|1971년 대선]]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제8대 총선]]에서 야당의 잇다른 약진이 정권의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해였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가 1975년까지임에도 불구하고 급히 반대파를 내칠 조치를 취하고 [[10월 유신]]을 선포해서 종신집권제로 변환할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나름 반대파를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유신은 남아있던 공화당 내의 충성파들도 고개를 저을 정도의 무리수였다. 민주공화당이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여파는 [[10.26 사건]] 이후에도 이어지는데, 박정희 사후의 정국에서 김종필을 비롯한 민주공화당 세력은 영향력을 많이 잃었다. 공화당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불법 장악한 [[신군부]]와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민당(1967년)|신민당]]이 양분되어 주도하는 정국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채 공화당 출신 정치인들은 신군부가 결성한 5공의 관제야당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치생명을 이어나갔고, 나머지 인원들은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나마 김성곤은 정계 은퇴 후 도미해서 보스턴에서 지내다가, 1973년 1월 트루먼 대통령 장례식 참석차 방미한 김종필과 만나게 되었는데, 김성곤이 반성의 기미를 보이자 김종필이 중재하여 1973년 9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임명되지만 1975년 2월에 62세의 나이로 뇌출혈로 급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